「경복궁」 변경 비교
(빈 문서) → r1 · 2026년 8월 23일
| 이전 줄 번호 | 이전 — (빈 문서) | 이후 줄 번호 | 이후 — r1 · 2026년 8월 23일 |
|---|---|---|---|
| 1 | [[분류:건축물]] | ||
| 2 | |||
| 3 | ## 개요 | ||
| 4 | |||
| 5 | 경복궁은 1395년에 조선의 정궁(법궁)으로 지어져 서울 도성 북쪽에 남북 중심축을 따라 배치된 목조 궁궐이다. | ||
| 6 | |||
| 7 |  | ||
| 8 | |||
| 9 | ## 자리와 배치 | ||
| 10 | |||
| 11 |  | ||
| 12 | |||
| 13 | 도해 출처 — 남북 축 위의 전각 차례와 전조후침 배치는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「경복궁」 항목,[^1] 동쪽·서쪽 궁성문의 자리는 같은 사전의 「경복궁 건춘문」[^2]·「경복궁 영추문」[^3] 항목을 읽고 우리 그림으로 새로 그렸다. 남의 도면을 옮긴 것이 아니며, 칸 수와 실제 거리를 재어 그린 축척 도면도 아니다. | ||
| 14 | |||
| 15 | - 백악산(북악산)을 등지고 남쪽을 바라본다. 산을 배경에 두면 건물을 낮게 지어도 궁궐이 크게 보인다. | ||
| 16 | - 하나의 남북 축에 정문·중문·정전·편전·침전을 차례로 놓는다. 축 위의 문을 지날수록 마당이 좁아지고, 담과 행각(건물을 둘러싼 긴 복도형 건물)이 마당을 하나씩 끊는다. | ||
| 17 | - 앞쪽(남)에 정사를 보는 외전을 두고 뒤쪽(북)에 사는 침전을 두는 전조후침(前朝後寢) 격식을 따랐다.[^1] | ||
| 18 | - 창건 당시 규모는 390여 칸으로, 근정전·강녕전·보평청 같은 기본 전각만 갖추었다.[^1] | ||
| 19 | - 궁성문은 남쪽 광화문, 동쪽 건춘문,[^2] 서쪽 영추문,[^3] 북쪽 신무문의 네 곳이다. | ||
| 20 | - 궁 이름은 『시경』의 「군자만년 개이경복」에서 「경복」 두 자를 따왔다.[^1] | ||
| 21 | |||
| 22 | :::구분[축을 먼저 잡는 이유] | ||
| 23 | 축은 공사의 기준선 노릇을 한다. 문과 전각의 중심을 한 줄에 맞추면 [[기단]]·계단·어도(임금이 다니는 길)의 좌우 치수가 그 선에서 정해진다. 복원 공사에서 옛 기단과 [[초석]] 자리를 발굴로 먼저 찾는 것도 같은 까닭이다. 축과 칸 나눔을 되찾지 못하면 그 위에 올리는 [[목구조]]가 전부 어긋난다. | ||
| 24 | ::: | ||
| 25 | |||
| 26 | ## 주요 전각 | ||
| 27 | |||
| 28 | ### 근정전 — 정전 | ||
| 29 | |||
| 30 | - 정면 5칸, 측면 5칸의 중층(2층) [[팔작지붕]] 건물이다.[^4] 겉은 2층이지만 안은 위아래가 트인 한 공간이다. | ||
| 31 | - [[공포]](기둥 위에서 지붕 무게를 받아 퍼뜨리는 짜임)는 [[다포]]계이고, 앞뒤 툇간을 둔 11량 구조다.[^4] | ||
| 32 | - 바깥두리기둥과 안두리기둥에 귀고주를 세워 중층의 하중을 받는다.[^4] | ||
| 33 | - [[기단]]은 이중 [[월대]]다. 위아래 단 둘레에 돌난간을 돌리고 난간 기둥머리에 십이지상을 새겼다.[^4] | ||
| 34 | - 가운데 계단의 답도에 봉황을 새겼고, 근정문까지 이어지는 어도 좌우에 품계석을 세웠다.[^4] | ||
| 35 | - 지금 건물은 1867년 중건분이다. 2000년 1월부터 2003년 10월까지 46개월 동안 1층 서까래와 2층 부분을 해체해 다시 짰다.[^4] | ||
| 36 | |||
| 37 | ### 사정전 — 편전 | ||
| 38 | |||
| 39 | - 정면 5칸, 측면 3칸 단층이고 지붕은 [[팔작지붕]]이다.[^5] [[공포]]는 [[다포]]계 내외 2출목이다.[^5] | ||
| 40 | - 임금이 평상시 머물며 정사를 보던 자리다.[^5] 동쪽 만춘전, 서쪽 천추전과 함께 편전 일곽을 이룬다.[^5] | ||
| 41 | |||
| 42 | ### 강녕전·교태전 — 침전 | ||
| 43 | |||
| 44 | - 강녕전은 왕의 침전이다. 정면 11칸, 측면 5칸이고 대청마루·[[온돌]]방·툇마루·협실·누마루로 짜인 좌우 대칭 평면이다.[^6] | ||
| 45 | - 강녕전은 1917년 창덕궁 내전을 다시 짓는다는 명목으로 헐렸다. 1990년 침전 터 발굴조사를 거쳐 1994년 12월 12일 복원을 마쳤다.[^6] | ||
| 46 | - 교태전은 왕비의 침전이다.[^7] 1920년에 헐려 창덕궁 대조전의 부재로 쓰였다.[^7] | ||
| 47 | - 교태전 뒤뜰은 아미산이라 부르는 [[화계]](계단식 화단)로 꾸미고, 꽃무늬를 새긴 굴뚝을 그 위에 세웠다.[^7] | ||
| 48 | |||
| 49 | ### 자경전 — 대비 침전 | ||
| 50 | |||
| 51 | - 정면 10칸, 측면 4칸이다. 동쪽에 청연루(정면 1칸·측면 2칸)와 협경당(정면 6칸·측면 2칸)이 이어 붙는다.[^8] | ||
| 52 | - 지붕은 [[팔작지붕]]에 부연을 단 [[겹처마]]이고, [[공포]]는 [[익공]]계 이익공이다.[^8] | ||
| 53 | - 가운데 대청을 두고 양쪽에 큰 [[온돌]]방을 들였다.[^8] 뒷담의 십장생 굴뚝은 1985년에 따로 보물로 지정되었다.[^8] | ||
| 54 | - 담에 모란·석류·매화 무늬를 넣은 꽃담을 둘렀다.[^8] 1867년에 신정왕후를 위해 지었고, 불에 탄 뒤 1888년에 다시 지었다.[^8] | ||
| 55 | |||
| 56 | ### 경회루 — 누각 | ||
| 57 | |||
| 58 | - 네모난 연못 안에 세운 정면 7칸, 측면 5칸의 중층 [[팔작지붕]] 누각이다.[^9] | ||
| 59 | - 기둥은 모두 48개로 바깥 24개, 안 24개다.[^9] [[공포]]는 [[익공]]계 이익공으로, [[다포]]계인 근정전보다 짜임이 단출하다.[^9] | ||
| 60 | - [[기단]]은 [[장대석]]으로 쌓고 둘레에 팔각 돌난간을 돌렸다.[^9] 용마루 끝에 취두를 올렸고, 뭍과는 돌다리 세 개로 잇는다.[^9] | ||
| 61 | |||
| 62 | ### 향원정 | ||
| 63 | |||
| 64 | - 연못 가운데 섬에 세운 정면 1칸, 측면 1칸의 중층 육모지붕 정자다. 처마는 [[겹처마]]이고, 위아래 층 크기가 같은 정육각형 평면이다.[^10] | ||
| 65 | - 1885년 무렵 세운 것으로 본다.[^10] | ||
| 66 | |||
| 67 | ## 궁성문 | ||
| 68 | |||
| 69 | ### 광화문 — 정문 | ||
| 70 | |||
| 71 | - 석축 [[기단]]에 홍예문(무지개 모양 아치문) 세 개를 뚫고 그 위에 문루를 올렸다.[^11] | ||
| 72 | - 문루는 정면 3칸, 측면 2칸의 [[다포]] 형식 중층집이고 지붕은 [[우진각지붕]]이다.[^11] | ||
| 73 | - 1865년에 다시 지었다.[^11] 1927년 조선총독부 청사가 들어서면서 건춘문 북쪽으로 옮겨졌다.[^11] | ||
| 74 | - 1968년에 석축을 손보고 문루를 철근콘크리트로 세웠다가, 2006년에 헐고 목조로 다시 지어 2010년 8월에 마쳤다.[^11] | ||
| 75 | |||
| 76 | ### 건춘문·영추문 | ||
| 77 | |||
| 78 | - 건춘문은 동쪽 문이다. 정면 3칸, 측면 2칸의 [[우진각지붕]] 단층 건물이고, [[익공]]계 [[겹처마]]에 지붕마루에는 용두·취두·[[잡상]]을 올렸다.[^2] 1865년 중건 때 세웠고, 문반만 드나들던 문이다.[^2] | ||
| 79 | - 영추문은 서쪽 문이다. 앞면 3칸, 옆면 2칸의 목조 문루로, 석축에 홍예문을 내고 그 위에 문루를 세웠다.[^3] 2익공 [[겹처마]] [[우진각지붕]]이다.[^3] | ||
| 80 | - 영추문은 1426년에 지금 이름을 얻었고,[^3] 임진왜란으로 불탄 뒤 고종 때 다시 지었다.[^3] 1926년 무렵 전차 노선을 놓으면서 헐렸고, 1975년에 원래 자리에서 조금 옮겨 콘크리트로 복원했다.[^3] | ||
| 81 | |||
| 82 | ## 목구조와 마감 | ||
| 83 | |||
| 84 | 궁궐 건축도 살림집과 같은 [[목구조]]를 쓴다. 다만 부재를 굵게 잡고, 격식에 따라 짜임과 마감의 등급을 달리한다. | ||
| 85 | |||
| 86 | | 부위 | 궁궐 전각에서 | 그렇게 하는 까닭 | | ||
| 87 | | --- | --- | --- | | ||
| 88 | | [[기단]] | [[장대석]] 바른층쌓기, 정전은 이중 [[월대]] | 목재를 지면 습기에서 띄운다. 단의 높이로 건물의 격을 나타낸다 | | ||
| 89 | | [[초석]] | 화강석 다듬돌 | 기둥 밑둥이 물을 먹지 않게 하고 하중을 지반으로 넘긴다 | | ||
| 90 | | [[공포]] | 정전·정문은 [[다포]], 누각·침전은 [[익공]] | 처마를 멀리 내밀수록 짜임이 복잡해진다. 격식이 높은 건물일수록 출목이 늘어난다 | | ||
| 91 | | 지붕 | [[팔작지붕]](정전·편전·누각), [[우진각지붕]](궁성문), 육모(정자) | 지붕 모양으로 건물의 성격을 구분했다 | | ||
| 92 | | 벽체 | 기둥 사이에 인방을 걸고 심벽에 회 마름질 | 목구조가 힘을 받고 벽은 채움재 노릇만 한다 | | ||
| 93 | | 채색 | [[단청]] | 목재를 자외선과 벌레에서 막고, 색과 무늬로 등급을 표시한다 | | ||
| 94 | |||
| 95 | - 지붕마루 끝에는 취두·용두·[[잡상]]을 올린다.[^2] 장식이면서 기와 마루의 마구리를 눌러 마감하는 부재다. | ||
| 96 | - 굴뚝은 [[전돌]](구운 벽돌)로 쌓아 조형물처럼 다루었다. 아미산 굴뚝은 화강석 지대석 위에 육각으로 쌓았다.[^12] | ||
| 97 | - 아미산 굴뚝은 아래에 벽사상을 새긴 벽돌, 가운데에 십장생·사군자·만자문 회벽, 위에 봉황을 새긴 벽돌과 당초문 회벽을 층층이 둘렀다.[^12] 맨 위는 소로·창방·첨차 모양 벽돌로 마감하고 기와지붕과 연가(연기가 나가는 꼭대기 장식)를 얹었다.[^12] 같은 형식이 넷 남아 있다.[^12] | ||
| 98 | |||
| 99 | ## 짓고 다시 지은 내력 | ||
| 100 | |||
| 101 | | 시기 | 일 | | ||
| 102 | | --- | --- | | ||
| 103 | | 1394~1395년 | 신도궁궐조성도감을 두어 짓기 시작해 이듬해 완성. 390여 칸[^1] | | ||
| 104 | | 1592년 | 임진왜란으로 전소. 이후 약 270년간 폐허[^1] | | ||
| 105 | | 1865~1867년 | 중건. 7,225칸 반 규모, 후원 전각 256칸[^1] | | ||
| 106 | | 1910년대 이후 | 4,000여 칸을 헐어 민간에 팔고, 1917년 창덕궁 화재 뒤 전각을 뜯어 자재로 씀[^1] | | ||
| 107 | | 1917년 | 강녕전 철거[^6] | | ||
| 108 | | 1920년 | 교태전 철거[^7] | | ||
| 109 | | 1926년 | 흥례문 권역에 조선총독부 청사 준공[^13] | | ||
| 110 | | 1963년 | 사적으로 지정[^1] | | ||
| 111 | | 1994년 | 강녕전 복원[^6] | | ||
| 112 | | 1995~1996년 | 총독부 청사 철거(1995년 8월 15일 착수, 1996년 11월 13일 완료)[^13] | | ||
| 113 | | 1990~2010년 | 1차 복원 정비[^14] | | ||
| 114 | | 2011~2045년 | 2차 복원 정비 사업 진행 중[^14] | | ||
| 115 | |||
| 116 | - 1592년에 불탄 뒤 270년 동안 다시 짓지 못했다.[^1] 그 사이 [[창덕궁]]이 정궁 노릇을 했다. | ||
| 117 | - 중건 규모 7,225칸 반은 창건 때 390여 칸의 18배가 넘는다.[^1] 짧은 기간에 이만한 목재와 석재를 모으는 일이 뒤에 재정 부담으로 남았다. | ||
| 118 | |||
| 119 | ## 복원 사업 | ||
| 120 | |||
| 121 | - 1990년부터 2010년까지 1차 복원, 2011년부터 2045년까지 2차 복원 정비가 이어진다.[^14] 복원의 기준 시점은 고종 때 궁이 최종적으로 갖추어진 1888년이다.[^14] | ||
| 122 | - 최종 목표는 고종 당시 500여 동 가운데 205동으로, 원래 규모의 약 41%다.[^14] | ||
| 123 | - 광화문 앞 [[월대]]는 2022년 9월부터 2023년 5월까지 발굴조사를 했다. 전체 규모와 축조 방법, 네 단계에 걸친 변화 과정을 확인했다.[^15] | ||
| 124 | - 월대 아래에서는 조선 전기의 차일고리석과 석렬이 나왔다.[^15] | ||
| 125 | |||
| 126 | :::구분[복원 공사가 일반 수리와 다른 이유] | ||
| 127 | 남아 있는 부재가 거의 없는 전각은 발굴로 확인한 [[기단]]·[[초석]] 자리와 「북궐도형」 같은 도면 자료, 옛 사진에 기대어 새로 짓는다. 원래 부재를 살려 쓰는 수리와는 일이 다르다. 자재와 연장을 옛 방식으로 쓸지, 오늘의 구조 기준을 어디까지 반영할지는 권역마다 달리 정한다. | ||
| 128 | ::: | ||
| 129 | |||
| 130 | ## 국가유산 지정 현황 | ||
| 131 | |||
| 132 | 궁역 전체가 사적이고, 그 안의 개별 건물이 국보·보물로 따로 지정되어 있다. 지정과 관리의 근거는 {{법:문화유산의 보존 및 활용에 관한 법률}} 이다. | ||
| 133 | |||
| 134 | | 대상 | 종목 | 지정 | | ||
| 135 | | --- | --- | --- | | ||
| 136 | | 경복궁(궁역) | 사적 | 1963년[^1] | | ||
| 137 | | 근정전 | 국보 | 1985년 1월 8일[^4] | | ||
| 138 | | 경회루 | 국보 | 1985년[^9] | | ||
| 139 | | 사정전 | 보물 | 2012년 3월 2일[^5] | | ||
| 140 | | 자경전 | 보물 | 1985년 1월 8일[^8] | | ||
| 141 | | 향원정 | 보물 | 2012년 3월 2일[^10] | | ||
| 142 | | 자경전 십장생 굴뚝 | 보물 | 1985년[^8] | | ||
| 143 | | 아미산 굴뚝 | 보물 | 1985년[^12] | | ||
| 144 | |||
| 145 | ## 같이 보기 | ||
| 146 | |||
| 147 | - [[창덕궁]] | ||
| 148 | - [[목구조]] | ||
| 149 | - [[공포]] | ||
| 150 | - [[다포]] | ||
| 151 | - [[익공]] | ||
| 152 | - [[팔작지붕]] | ||
| 153 | - [[우진각지붕]] | ||
| 154 | - [[단청]] | ||
| 155 | - [[온돌]] | ||
| 156 | - [[월대]] | ||
| 157 | - [[전돌]] | ||
| 158 | |||
| 159 | ## 출처 | ||
| 160 | |||
| 161 | [^1]: 한국학중앙연구원 「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」 경복궁 항목, https://encykorea.aks.ac.kr/Article/E0002434 | ||
| 162 | [^2]: 한국학중앙연구원 「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」 경복궁 건춘문 항목, https://encykorea.aks.ac.kr/Article/E0002437 | ||
| 163 | [^3]: 한국학중앙연구원 「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」 경복궁 영추문 항목, https://encykorea.aks.ac.kr/Article/E0076898 | ||
| 164 | [^4]: 국가유산청 국가유산 디지털 서비스 「경복궁 근정전」, https://digital.khs.go.kr/heri/heriDetail.do?ctptNo=1111102230000 · 한국학중앙연구원 「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」 경복궁 근정전 항목, https://encykorea.aks.ac.kr/Article/E0002442 | ||
| 165 | [^5]: 한국학중앙연구원 「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」 경복궁 사정전 항목, https://encykorea.aks.ac.kr/Article/E0002445 | ||
| 166 | [^6]: 한국학중앙연구원 「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」 경복궁 강녕전 항목, https://encykorea.aks.ac.kr/Article/E0002435 | ||
| 167 | [^7]: 한국학중앙연구원 「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」 경복궁 교태전 항목, https://encykorea.aks.ac.kr/Article/E0002440 | ||
| 168 | [^8]: 한국학중앙연구원 「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」 경복궁 자경전 항목, https://encykorea.aks.ac.kr/Article/E0002448 | ||
| 169 | [^9]: 한국학중앙연구원 「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」 경복궁 경회루 항목, https://encykorea.aks.ac.kr/Article/E0002438 | ||
| 170 | [^10]: 국가유산청 국가유산 디지털 서비스 「경복궁 향원정」, https://digital.khs.go.kr/heri/heriDetail.do?ctptUid=13898859672787200591 | ||
| 171 | [^11]: 한국학중앙연구원 「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」 경복궁 광화문 항목, https://encykorea.aks.ac.kr/Article/E0002439 | ||
| 172 | [^12]: 한국학중앙연구원 「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」 경복궁 아미산 굴뚝 항목, https://encykorea.aks.ac.kr/Article/E0002447 | ||
| 173 | [^13]: 행정안전부 국가기록원 「기록으로 만나는 대한민국 — 조선총독부 청사 철거」, https://theme.archives.go.kr/next/koreaOfRecord/joseonChong.do | ||
| 174 | [^14]: 국가유산청 경복궁관리소 「경복궁 2차 복원 정비 사업」, https://www.royalpalace.go.kr/content/data/data_03_13.asp | ||
| 175 | [^15]: 국립서울문화유산연구소 「경복궁 광화문 월대 발굴조사 보고서」 (2025) |